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좋은시 좋은글

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/김지하

by 아스팜농장 2008. 9. 21.


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/김지하


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
고원에 만발한 한아름 나리꽃 아고 산철쭉도 안고
그보다도 더 아리따운
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
내가 나가 반겨
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
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
내가 이렇게
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
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
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
낡아빠진 석탄 차
녹슬은 기관차
지금은 국민학생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차
그 차
휴전선에 잘린 경의선
경의선 화통
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
그 기관차를
새파란 동백잎, 빛나는 유자 무더기,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
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
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
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
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
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
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
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
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
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
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
아 아 꽃들이여
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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